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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앞서, 이 글은 그저 개인의 기억 저장소 역할을 목적으로 한 글입니다.

맹목적인 자료에 대한 신뢰나 비난은 읽는이 본인에게 해로울 수 있으니 이점 참고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비판과 비평은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과거 개인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필자는, '나'를 최대한 상세한 구성요소로 분류하여 각각의 정의를 이어고오 있다.

오늘은 지난번에 정의한 '궤변론'에 이어 '헤겔주의자' 로서의 본인을 기준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궤변론에 대한 내용은 https://sophistlab.tistory.com/2 해당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목차

1. 헤겔주의란? (무조건은 없다)
*헤겔의 생애와 업적
*헤겔주의의 핵심 개념
*헤겔의 사상적 영향력  

2. 변증법이란? 

*변증법의 기본 원리 

*헤겔의 변증법적 이상주의 

*변증법의 현대적 이해 

 

3. 헤겔주의와 궤변의 연관성 

*헤겔주의에서의 상대주의적 접근
*궤변론과 헤겔주의의 비판적 관점
*헤겔의 작품에서의 궤변론적 측면 

 

4. 헤겔주의자들은 궤변론자들인가? 

*헤겔주의자의 다양한 해석과 이해
*헤겔주의자들 중 궤변론에 대한 비판
*궤변론과 헤겔주의의 관련성에 대한 현대적 해석  

 

 

 

 

1. 헤겔주의란?

헤겔주의는 독일의 철학자 겸 역사학자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빌헬름 헤겔의 철학적 사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의 철학은 'dialectical idealism(변증법적 이상주의)'으로, 역사적 발전과 인간 이해에 중점을 둡니다.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대립하는 개념이 결합하여 더 높은 단계의 진리나 개념이 형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헤겔은 절대적 진리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이는 '무조건은 없다'는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2. 변증법이란?

변증법은 대립하는 개념이 결합하여 새로운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cf. 정반합) 을 강조하는 철학적 방법론입니다. 

헤겔은 이 변증법을 철학적인 사고 방식으로 채택했는데, 이는 그의 'dialectical idealism'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변증법은 현상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역사적, 사회적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3. 헤겔주의와 궤변의 연관성

헤겔주의는 상대주의적인 사고를 강조합니다. 헤겔은 모든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상대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인간 정신의 발전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때로 궤변론적인 해석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논리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이는 헤겔주의의 궤변론적인 면모를 논의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4. 헤겔주의자들은 궤변론자들인가?

헤겔주의자들 중에서 일부는 궤변론적인 해석을 받기도 했습니다. 헤겔의 작품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일지라도 여전히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헤겔의 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자들에게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헤겔주의자 중에서 궤변론으로 인해 논란이 있었던 인물 중에는 아비타르 나히(Avatar Singh Nahal)가 있습니다. 그는 헤겔의 작품에 대한 해석에서 궤변론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그의 접근 방식이 혼란스럽다고 비판받았습니다. 그의 해석은 헤겔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다소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또한, 헤겔의 작품을 궤변론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후기 헤겔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헤겔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서 궤변론적인 측면을 강조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해석이 다소 난해하다고 비판받았습니다.

헤겔주의는 다양한 해석과 이해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궤변론적인 해석은 단지 헤겔의 작품이 얼마나 복잡하고 해석이 다양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헤겔의 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자들에게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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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란 무엇인가?

 

부제 : '다리파'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완벽한 '선'의 여부에 대하여

 

목차

1. '다리파'는 무엇인가

2. 선에 대한 의심

3. 필자가 말하는 '시선' 이란?

 

 

 

1. '다리파'는 무엇인가?

 

다리파는 독일 드레스덴의 고등공업학교 학생이었던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로틀루프 등 멤버가 포함된 독일의 표현주의 그룹으로 '브뤼케'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당시 그들의 혁명적인 정신과 회화를 연결하는 '다리(bridge)'가 되고자 했던 다리파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전시를 열었고, 인상주의적인 분리파에 반항해 내적 자아를 직접 표출하려 시도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다리파는 정열이나 불안의 극적인 요소들을 그림의 주요 소재로 다루고, 회화의 방법 자체보다도 내적인 충동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들은 반 고흐, 고갱, 뭉크에 심취했고, 흑인 조각에 이끌려 그 열광과 불안을 회화, 목조, 목판화, 석판화, 에칭, 포스터 등의 갖가지 조형수단을 통해 형상화 하는 작업을 이어가며 그 구축을 강화시켰다.

 

 특히 다리파를 창립한 키르히너는 미술을 내적 갈등의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시각 표현으로 보고 강렬한 회화적 분출을 추구했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훗날 독일 표현주의로 알려지게 될 사조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참고- 현대 미술의 문맥 읽기-강태희저,미진사. 테마 현대 미술 노트-진 로버트슨,크레이그 맥 다니엘 공저. 두성북스)

 

2. '선'에 대한 의심

 

다리파는 작업들의 형태적인 측면과 작가들의 내적자아를 표출하려는 방향성 때문에 그 이름을 예술사에 남기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점은 그들의 “무브먼트”로서의 회동이다.

 

굵고 뚜렷한 선. 확신에 차있는 듯 느껴지면서도 불안함을 자아내는 표현들이 내 개인의 작업이 향하고 싶은 방향과 너무 닮아있기도 하였지만, 타과생의 입장에서 복수전공으로 진로를 결정 한 후 일종의 ‘소속감의 방황’을 느끼던 나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단체였다.

 

혼자서 사고를 계속 이어가는 행위가 아닌 서로 비평해줄 수 있고 서로 조언 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을 옆에 두는 것 역시 작가가 이어나가야 할 몫이라는 생각을 근래 많이 가지게 되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서만 현상을 읽어 나갈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 을 쫓으며 최대한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들을 나의 사고방향과 일치시켜 나갈것이고, 이 글에서는 그런 방향들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며 발표하겠다.

 

3. 필자가 말하는 '시선' 이란?

 

[시선 視線]
1.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 ≒내자3(內眥)ㆍ목용ㆍ목자5(目眥)ㆍ안자3(眼眥).
시선을 돌리다

2.주의 또는 관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최근 환경 문제에 세인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3.미술 투시 도법에서, 시점(視點)과 물체의 각 점을 잇는 직선.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대한민국은 체면 국가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형적인 한국의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라온 나는 이 말을 보증하듯이 살아오고 있다.

 

 다만, 다른이들보다 조금 더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는게 나와 남들의 차이인것 같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며 다른이들의 시선에 의존하던 나는 불현듯

 ‘예술하는 사람은 멋있다 -> 미대는 멋있다’. 라는류의 생각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다른사람들이 보기에 ‘멋있는사람’ 이라는 명칭이 항상 시작의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과거 ‘미대수업 듣는남자’ 라는 타이틀에 만족하고 그림에도 흥미를 갖게되던중 “시선”에 문제가 생겼다. 

 

정확히는 ‘나 자신’이 생각하는 시선에 대한 ‘정의’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항상 ‘선’ 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는 이 ‘선’은 직선일까? 곡선일까?
우리눈에 보이는 직선들은 완벽하지 않다.


가령 시중에 판매되는 직선자도 현미경으로 확대하면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있고, 일자로 뻗어가는 빛의 형상또한 파동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이런 의심들은 점차 번져가며 내가 가진 모든 ‘시선’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항상 ‘타인’의 시선만을 신경쓰고 염려하던 ‘나’는 이제 ‘타인’과는 다른 시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의심들들 통해 작업을 위한 가설을 만들어냈다.

<내가 보는 직선이 사실은 직선이 아닐 수도 있다.
내게 흐물거리게 보이는 이 ’선’이 직선일 수도 있다.>

‘여기’에 있는 나와 다른 이들의 ‘선’ 들이 이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하며

타인들로 하여금 “당신에게 보이는 이 현상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리 보일수도 있다”는 색다른‘시선’을 제안하고 싶다.

 

 그 와중 찾게된 다리파의 작업들은 매우 불안하면서 장황한 ‘시선’들을 나에게 제공해 주었다.

형체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많지만 그러한 부분이 일종의 가능성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 같았다.

 

다리파가 제시하고 싶었던 시선은 기존의 아카데믹한 형식과 새롭게 태동하는 모더니즘의 두 양식 사이에 어딘가 존재하는 형태를 잡고자 하는것처럼 보였다.

 

밝고, 때로는 어둡고, 대조적인 강렬한 색채와 빠르고 단순한 형태의 붓질들이 어쩌면 동양화같기도, 서양화같게도 보여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작업을 시작하고 헤매면서 가장 배제하고자 했던게 A는B다 라고 정의하는듯한 작업들이 었는데 마치 그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형상들이 있듯 그려낸 것처럼 말이다.

 

항상 무조건은 없다 라는 식의 생각을 가져왔기 때문에 더욱 개인적으로 작업에 투영하고 싶었던 부분인것 같다.

 

‘다리파’라는 이름처럼 이전과 이후의 순간을 잡는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은 ‘어딘가에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는 가능성’ 고정 좌표를 찍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줬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시계는 절대적인 우주의 시간과 100퍼센트 동일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고장난 시계는 하루에 두번 정확한 어느 순간을 ‘고정하며 잡아두듯이’ 말이다.

 

항상 눈앞에서, 옆에서 이루어지는 차이는 날이 지난다고 해서 크게 와닿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변화, 가장 친한 친구의 성장과정, 동기들의 모습들은 하루하루가 지나도 그저 동일선상의 반복에 그쳐있었지만 오랬동안 떨어져있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모습은 지난 몇달, 몇년의 시간동안 많이 변모해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변화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일어나서 대개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지금 거의 일상적인 수준에서 그 변화의 효과를 마주치며 살고있다.(-우리들이 아는것은 모두 틀렸다- 인용)

 

 이러한 개인기준에서의 놓치기 쉬운(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보게된다면 굉장히 커다란) 변화를 다루며 어떻게 자기자신을 최대한 객관화 시키며 그로 인해 어떻게 독창적이 될까 라는 생각에 대해 한 시점을 고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시대의 (작게나마 조금씩,그러나 후에 지나고나면 확연하게 변하는) 흐름속에서 개인의 변화를 빨리 캐치하고 그걸 동시대적인 마인드로 바꾸는 것 역시 중요하게 다룰 부분 중 하나라고 느꼈다. 

 

내가 아무리 내 개인의 문제에 뚜렷하고 확실한 의견을 가져도, 그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아야 한다.

유동적인 모습또한 현시대의 현자를 꿈꾸는 ‘우리’가 갖춰야 할 모습일 것이다.

 

‘정저지와’라는 말처럼 현시대 우리는 우물안에 갇히기 너무 쉬운 상황에 놓여져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약과 파란약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듯, 언젠가 우리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결론-

 여기까지 나의 사고에 있어서의 ‘주관’ 이 정리되었다면 이것을 조금 더 구체화 시키고 확립시키기 위해 ‘휩쓸리지 않는 방법’을 깨달아야한다.

 

분명 많은 작가들과 미술주의 운동에서 내가 채택하고 흡수해야 할 것도 있지만 무분별하게 그런 모습만 따라다니게 된다면 더이상 ‘나’의 생각이 아니게 될것이다.

 

 나는 앞서 말했던 시선에 관련된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시선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의 눈앞에 펼쳐진 선들’ 뿐만 아니라 ‘나의 작업을 바라보는 타인의 눈길들’ 도 포함이 되어야 한다. 그런 시선들은 분명 상황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할것이고, 그런 돌발사태들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항상 의심하고 항상 대비해야 한다. 나의 ‘시선’ 들은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던 시선의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시선의 의심’ 역시 다리파에서 뽑아올만 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슬프게 보여지고 싶었는지 아닌지, 이런 모호하면서도 그림을 그린 본인들은 명백했을지 모를 표현들을 끌어오고싶다.

 

 바꿔 얘기하자면 상반된 주장과 개념에서의 가능성들을 보아야 하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으레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지극히 단순화시켜서 개인의 경험에 빗대어 해석한다고 글에서는 설명한다. 이에 대해 균형을 잡으려면, 물론 나의 개인의 이야기를 작업에 녹여내어 풀어내는 일 역시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를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만들고 내가 가진 개인적 견해들을 설명하고 설득하며 제시하는것도 나의 작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즉 결론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면 나의 시각은 ‘나’인 동시에 ‘나를 제외한 다른사람들’ 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물을 볼때 A는B다 라는 식의 절대적인 정의를 피하고, 상황에 따라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다 라는 사고와 견해를 키워야 한다.

 

사물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바라본뒤 표현하는 방식이 아닌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 시작하여 심상적인 느낌으로만 이어가려하는 내 작업들에서 조금 더 구체화된 형상들과 선들로 이어나가기를 기대한다.

내 작업에서의 다리파의 ‘다리’는 무엇이든 될수 있다. 두 상황,혹은 물체의 작용에 의심(혹은 시각적 의심)을 더하면 된다.

 

 

점과 점 사이의 의심. 면과 면 사이의 의심. 입체와 입체 사이의 의심.공간과 공간 사이의 의심. 시간과 시간 사이의 의심

 

 

시대상으로 보면 비슷한 시기의 야수파와 청기사파 사이에 껴있는 이 다리파 또한 대조가 강한 색감/이전에 없었던 모습들과 자신의 사상을 다르게 표현하는 부분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보이며 공통점을 자아내지만 지극히 대중적으로 합쳐지지 못해 인지도가 높지 않다는 부분도 있다.

 

허나 이전과 지금의 작업을 가르게 되어줄 ‘시선’ 이라는 키워드를 잡은 지금 다른 이들의 관점에만 집중하는 ‘보여주기’ 식이 아닌 ‘내자신’과 ‘현시대, 현시점’, ‘의심’을 잘 녹여낸 작업들을 진행하겠다. 

 

당연시 여겼던 어느 ‘상호작용’들을 이어주는 다리를 의심하고 끊는 순간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다리’가 생겨나고 끊임없이 작업들을 진행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무조건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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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궤변가

2. 궤변이란

3. 궤변의 종류

4. 궤변의 활용

 

 

 

궤변을 알기 전에 궤변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에 대해 정의를 시작한다.

 

1. 궤변가

'궤변가'란 무엇인가.

궤변가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한 그룹이나 학파를 가리킨다.

영어로 소피스트(Sophist)라고 하며 이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한 지식인들로, 주로 말과 언어에 대한 전문가이자 교육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이 가장 정확하고 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소피스트들은 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현대적인 논리와 언어철학의 성장에 영감을 주는 요소가 되었다.

 

즉, 총균쇠에서 말하듯 농업의 발달로 다들 당장 내일의 먹거리 걱정을 놓게 될 수 있자 사고에 대한 여유가 생겼고

'사고의 여유'가 확장되어 만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의심'과 '의식', '관철'로 연장되어 확장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2. 궤변이란

그렇다면 궤변()이란 무엇일까??

한문을 뜯어보자면 속일궤詭, 말씀(또는 판별할)변辯 자를 쓴다.

판별이나 말을 속이는 행위라는 것이다.

 

단어적 적의로 보자면

상대편을 이론으로 이기기 위하여 상대편의 사고(思考)를 혼란시키거나 감정을 격앙시켜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며 대는 논법(네이버국어사전) 이다.

얼핏 들으면 논리적이지만, 실제로는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인해 파생되는 무수한 사고의 가능성을 생각했을떄, 이 논리적 오류는 참으로 이로운것이 아닐수 없다.

보통 궤변의 종류는 아래 네가지로 분류된다.

 

3. 궤변의 종류

 

1) 묵적 전제의 오류: 명제에 포함되지 않은 전제를 가정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오류.
eg) 예쁜애들은 보통 착하다, 하지만 너는 예쁘지 않으니 착하지도 않을것이다.

2) 동어반복의 오류: 같은 말을 되풀이하여 마치 다른 말인 것처럼 주장하는 오류.

eg) 나는 멋있다. 왜냐하면 나는 멋있기 때문이다.

3) 비약의 오류: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결론을 내리는 오류.

eg) 나는 태어나서부터 20살까지 170cm가 자랐다. 따라서 40살이 되었을때는 약 350~360cm정도의 신장이 될것이다.

4) 편견의 오류: 자신의 편견을 앞세워 논리를 전개하는 오류.

eg) (1의 예시를 빌려) 예쁜애들은 보통 착하다.

 

이렇듯, 궤변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몇몇의 단순한 궤변들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실용적이지 않아 보일 수 있으나, 우리는 이 궤변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4. 궤변의 활용

궤변 자체가 이로우니 이를 장려하는건 아니다. 다만, 궤변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궤변을 이해하면 궤변에 속지 않도록 할 수 있고, 궤변을 이해하면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우고 확장할 수 있게되어 종국에는 궤변이 아닌 '현명한 사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궤변의 활용을 경험 해보자.

궤변의 활용은 주로 확장 (주로 명제를 뒤틀거나 비약하는것) 에 기반한다.

 

가령, 1+1=? 의 문제를 기준으로 보았을때

보편의 기준으로 자연수1의 합으로 얻어지는 2의 값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이를 각각 '오류'하자면

 

1) 명제 : '특정'상황에서 1이 사실 일반적인 자연수가 아니라, 반올림하여 만든 1일수도 있다.

가령 0.6를 반올림하여 1이라는 수로 만든 경우에 0.6+0.6=1.2 -> 1(0.6반올림)+1(0.6반올림)=1(1.2반올림) 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2) 비약 : 1을 자연수가 아닌 하나의 개수로 가정해보자. 가령 남1과 여1을 예시로 들면 이 둘의 합은 2명이다.

허나 이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고 건장한 20~30대의 사회구성원이라면 1+1은 2 이상이 될 수 있는 확률이 생긴다.

자식을 여럿 낳을수도, 혹은 사고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2이하가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를 궤변의 확장을 통한 사고라고 한다. (또는 사고에 대한 의심)

 

이 궤변의 활용을 통하면 많은 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 가 열릴 수도 있다.

 

가령,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명제를 깰 수 있다면?? 또는 인간은 나이가 들 수록 노화한다는 사고를 깰 수 있다면??

음주운전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오토파일럿 기능이 완벽히 탑재된 차 등등)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 더 다양하고 복잡해지며 더욱 많은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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