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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란 무엇인가?

 

부제 : '다리파'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완벽한 '선'의 여부에 대하여

 

목차

1. '다리파'는 무엇인가

2. 선에 대한 의심

3. 필자가 말하는 '시선' 이란?

 

 

 

1. '다리파'는 무엇인가?

 

다리파는 독일 드레스덴의 고등공업학교 학생이었던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로틀루프 등 멤버가 포함된 독일의 표현주의 그룹으로 '브뤼케'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당시 그들의 혁명적인 정신과 회화를 연결하는 '다리(bridge)'가 되고자 했던 다리파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전시를 열었고, 인상주의적인 분리파에 반항해 내적 자아를 직접 표출하려 시도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다리파는 정열이나 불안의 극적인 요소들을 그림의 주요 소재로 다루고, 회화의 방법 자체보다도 내적인 충동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들은 반 고흐, 고갱, 뭉크에 심취했고, 흑인 조각에 이끌려 그 열광과 불안을 회화, 목조, 목판화, 석판화, 에칭, 포스터 등의 갖가지 조형수단을 통해 형상화 하는 작업을 이어가며 그 구축을 강화시켰다.

 

 특히 다리파를 창립한 키르히너는 미술을 내적 갈등의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시각 표현으로 보고 강렬한 회화적 분출을 추구했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훗날 독일 표현주의로 알려지게 될 사조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참고- 현대 미술의 문맥 읽기-강태희저,미진사. 테마 현대 미술 노트-진 로버트슨,크레이그 맥 다니엘 공저. 두성북스)

 

2. '선'에 대한 의심

 

다리파는 작업들의 형태적인 측면과 작가들의 내적자아를 표출하려는 방향성 때문에 그 이름을 예술사에 남기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점은 그들의 “무브먼트”로서의 회동이다.

 

굵고 뚜렷한 선. 확신에 차있는 듯 느껴지면서도 불안함을 자아내는 표현들이 내 개인의 작업이 향하고 싶은 방향과 너무 닮아있기도 하였지만, 타과생의 입장에서 복수전공으로 진로를 결정 한 후 일종의 ‘소속감의 방황’을 느끼던 나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단체였다.

 

혼자서 사고를 계속 이어가는 행위가 아닌 서로 비평해줄 수 있고 서로 조언 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을 옆에 두는 것 역시 작가가 이어나가야 할 몫이라는 생각을 근래 많이 가지게 되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서만 현상을 읽어 나갈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 을 쫓으며 최대한 개인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들을 나의 사고방향과 일치시켜 나갈것이고, 이 글에서는 그런 방향들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며 발표하겠다.

 

3. 필자가 말하는 '시선' 이란?

 

[시선 視線]
1.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 ≒내자3(內眥)ㆍ목용ㆍ목자5(目眥)ㆍ안자3(眼眥).
시선을 돌리다

2.주의 또는 관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최근 환경 문제에 세인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3.미술 투시 도법에서, 시점(視點)과 물체의 각 점을 잇는 직선.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대한민국은 체면 국가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형적인 한국의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라온 나는 이 말을 보증하듯이 살아오고 있다.

 

 다만, 다른이들보다 조금 더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는게 나와 남들의 차이인것 같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며 다른이들의 시선에 의존하던 나는 불현듯

 ‘예술하는 사람은 멋있다 -> 미대는 멋있다’. 라는류의 생각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다른사람들이 보기에 ‘멋있는사람’ 이라는 명칭이 항상 시작의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과거 ‘미대수업 듣는남자’ 라는 타이틀에 만족하고 그림에도 흥미를 갖게되던중 “시선”에 문제가 생겼다. 

 

정확히는 ‘나 자신’이 생각하는 시선에 대한 ‘정의’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항상 ‘선’ 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는 이 ‘선’은 직선일까? 곡선일까?
우리눈에 보이는 직선들은 완벽하지 않다.


가령 시중에 판매되는 직선자도 현미경으로 확대하면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있고, 일자로 뻗어가는 빛의 형상또한 파동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이런 의심들은 점차 번져가며 내가 가진 모든 ‘시선’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항상 ‘타인’의 시선만을 신경쓰고 염려하던 ‘나’는 이제 ‘타인’과는 다른 시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의심들들 통해 작업을 위한 가설을 만들어냈다.

<내가 보는 직선이 사실은 직선이 아닐 수도 있다.
내게 흐물거리게 보이는 이 ’선’이 직선일 수도 있다.>

‘여기’에 있는 나와 다른 이들의 ‘선’ 들이 이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하며

타인들로 하여금 “당신에게 보이는 이 현상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달리 보일수도 있다”는 색다른‘시선’을 제안하고 싶다.

 

 그 와중 찾게된 다리파의 작업들은 매우 불안하면서 장황한 ‘시선’들을 나에게 제공해 주었다.

형체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많지만 그러한 부분이 일종의 가능성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 같았다.

 

다리파가 제시하고 싶었던 시선은 기존의 아카데믹한 형식과 새롭게 태동하는 모더니즘의 두 양식 사이에 어딘가 존재하는 형태를 잡고자 하는것처럼 보였다.

 

밝고, 때로는 어둡고, 대조적인 강렬한 색채와 빠르고 단순한 형태의 붓질들이 어쩌면 동양화같기도, 서양화같게도 보여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작업을 시작하고 헤매면서 가장 배제하고자 했던게 A는B다 라고 정의하는듯한 작업들이 었는데 마치 그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형상들이 있듯 그려낸 것처럼 말이다.

 

항상 무조건은 없다 라는 식의 생각을 가져왔기 때문에 더욱 개인적으로 작업에 투영하고 싶었던 부분인것 같다.

 

‘다리파’라는 이름처럼 이전과 이후의 순간을 잡는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은 ‘어딘가에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는 가능성’ 고정 좌표를 찍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줬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시계는 절대적인 우주의 시간과 100퍼센트 동일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고장난 시계는 하루에 두번 정확한 어느 순간을 ‘고정하며 잡아두듯이’ 말이다.

 

항상 눈앞에서, 옆에서 이루어지는 차이는 날이 지난다고 해서 크게 와닿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변화, 가장 친한 친구의 성장과정, 동기들의 모습들은 하루하루가 지나도 그저 동일선상의 반복에 그쳐있었지만 오랬동안 떨어져있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모습은 지난 몇달, 몇년의 시간동안 많이 변모해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변화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일어나서 대개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지금 거의 일상적인 수준에서 그 변화의 효과를 마주치며 살고있다.(-우리들이 아는것은 모두 틀렸다- 인용)

 

 이러한 개인기준에서의 놓치기 쉬운(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보게된다면 굉장히 커다란) 변화를 다루며 어떻게 자기자신을 최대한 객관화 시키며 그로 인해 어떻게 독창적이 될까 라는 생각에 대해 한 시점을 고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시대의 (작게나마 조금씩,그러나 후에 지나고나면 확연하게 변하는) 흐름속에서 개인의 변화를 빨리 캐치하고 그걸 동시대적인 마인드로 바꾸는 것 역시 중요하게 다룰 부분 중 하나라고 느꼈다. 

 

내가 아무리 내 개인의 문제에 뚜렷하고 확실한 의견을 가져도, 그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아야 한다.

유동적인 모습또한 현시대의 현자를 꿈꾸는 ‘우리’가 갖춰야 할 모습일 것이다.

 

‘정저지와’라는 말처럼 현시대 우리는 우물안에 갇히기 너무 쉬운 상황에 놓여져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약과 파란약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듯, 언젠가 우리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결론-

 여기까지 나의 사고에 있어서의 ‘주관’ 이 정리되었다면 이것을 조금 더 구체화 시키고 확립시키기 위해 ‘휩쓸리지 않는 방법’을 깨달아야한다.

 

분명 많은 작가들과 미술주의 운동에서 내가 채택하고 흡수해야 할 것도 있지만 무분별하게 그런 모습만 따라다니게 된다면 더이상 ‘나’의 생각이 아니게 될것이다.

 

 나는 앞서 말했던 시선에 관련된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시선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의 눈앞에 펼쳐진 선들’ 뿐만 아니라 ‘나의 작업을 바라보는 타인의 눈길들’ 도 포함이 되어야 한다. 그런 시선들은 분명 상황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할것이고, 그런 돌발사태들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항상 의심하고 항상 대비해야 한다. 나의 ‘시선’ 들은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던 시선의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시선의 의심’ 역시 다리파에서 뽑아올만 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슬프게 보여지고 싶었는지 아닌지, 이런 모호하면서도 그림을 그린 본인들은 명백했을지 모를 표현들을 끌어오고싶다.

 

 바꿔 얘기하자면 상반된 주장과 개념에서의 가능성들을 보아야 하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으레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지극히 단순화시켜서 개인의 경험에 빗대어 해석한다고 글에서는 설명한다. 이에 대해 균형을 잡으려면, 물론 나의 개인의 이야기를 작업에 녹여내어 풀어내는 일 역시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를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만들고 내가 가진 개인적 견해들을 설명하고 설득하며 제시하는것도 나의 작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즉 결론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면 나의 시각은 ‘나’인 동시에 ‘나를 제외한 다른사람들’ 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물을 볼때 A는B다 라는 식의 절대적인 정의를 피하고, 상황에 따라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다 라는 사고와 견해를 키워야 한다.

 

사물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바라본뒤 표현하는 방식이 아닌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 시작하여 심상적인 느낌으로만 이어가려하는 내 작업들에서 조금 더 구체화된 형상들과 선들로 이어나가기를 기대한다.

내 작업에서의 다리파의 ‘다리’는 무엇이든 될수 있다. 두 상황,혹은 물체의 작용에 의심(혹은 시각적 의심)을 더하면 된다.

 

 

점과 점 사이의 의심. 면과 면 사이의 의심. 입체와 입체 사이의 의심.공간과 공간 사이의 의심. 시간과 시간 사이의 의심

 

 

시대상으로 보면 비슷한 시기의 야수파와 청기사파 사이에 껴있는 이 다리파 또한 대조가 강한 색감/이전에 없었던 모습들과 자신의 사상을 다르게 표현하는 부분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보이며 공통점을 자아내지만 지극히 대중적으로 합쳐지지 못해 인지도가 높지 않다는 부분도 있다.

 

허나 이전과 지금의 작업을 가르게 되어줄 ‘시선’ 이라는 키워드를 잡은 지금 다른 이들의 관점에만 집중하는 ‘보여주기’ 식이 아닌 ‘내자신’과 ‘현시대, 현시점’, ‘의심’을 잘 녹여낸 작업들을 진행하겠다. 

 

당연시 여겼던 어느 ‘상호작용’들을 이어주는 다리를 의심하고 끊는 순간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다리’가 생겨나고 끊임없이 작업들을 진행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무조건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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